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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서울

[우리고장문화유산] 양천향교

by U.ken 2018.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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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천향교 답사

양천향교는 서울 강서구의 대표 유적지로 내 직장과 가까운 곳이다. 지나다니면서 여러 차례 유적지 표지판을 보면서 이 장소의 존재를 알았다. 주변 역 이름도 양천향교역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냥 지나쳤던 곳이기도 하다. 블로그를 운영해오면서 다양한 장소를 방문하며 포스팅하고 있는데 어쩌면 자꾸 먼 곳으로만 눈을 돌렸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래서 무작정 찾아가 봤다. 마침 미세먼지도 적어 하늘이 파래 사진찍기에도 더없이 좋았다. 사진을 찍었을 때 파란 하늘이 여과 없이 비쳐서 나오면 기분이 좋아진다.

양천향교

향교에 대해

향교는 고려시대를 비롯하여 조선시대에 계승된 지방 교육기관으로서 국립 교육기관이다. 고려시대에 처음 생겼을 때는 향학이라 불렀다. 향교는 지방의 문묘와 그에 속한 학교로 구성된다. 지방의 종교기능과 교육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1392년(태조 1)에 여러 도의 안찰사에 명하여 학교의 흥망으로써 지방관 고과의 법으로 삼고 크게 교학의 쇄신을 꾀하였다. 부 · 목 · 군 · 현에 각각 1교씩 설립하고 점차 전국에 이르게 되었다.

향교의 구조

향교에는 문묘와 명륜당 및 중국과 한국의 선철 또는 선현을 제사하는 동서양무가 있다. 동서양재는 명륜당(강당)의 전면에 있으며 동재에는 양반, 서재에는 서류를 두고 보통 내외 양사로 갈라진다. 내사에 있는 자는 내사생이라 하고, 외사에는 내사생을 뽑기 위한 증광생을 두었다.

유생

유생의 수는 부 · 복에 90인, 도호부에 70인, 군에 50인, 현에 30인으로 정하고, 직원으로는 교수 · 훈도 각 1인, 소군에는 훈도 만을 두었으며, 또한 독서와 일과를 수령이 매월 관찰사에 보고하여 우수한 교관에게는 호역(세금)을 줄여 주었다. 수학한 경전은 시경, 서경, 주역, 예기, 춘추의 오경과 논어, 맹자, 중용, 대학의 사서이다.

이들 향교는 중앙의 사학과 같으며 여기에서 수학한 후 1차 과거에 합격하면 생원 · 진사의 칭호를 받고 성균관에 가게 되며, 다시 문과시에 응하여 고급관위에 오르는 자격을 얻었다. 그러므로 중기 이후의 향교는 과거의 준비장이 되었고, 후에 서원이 발흥하게 되자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1894년(고종 31) 말에 과거제도의 폐지와 함께 향교는 완전히 이름만 남아 문묘의 기능만 하게 되었다.

양천향교

태종 11년(서기 1411년)에 유학을 토대로 한 교육기관을 현재의 서울 강서구 궁산 자락에 건립했다.
대성전에는 공자님을 비롯한 4성위와 송조4현,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에 석전을 봉행하며 문묘 기능을 하며 유학을 연구 강론하는 지방 교육기관의 역할을 하였다. 연중 제일 큰 행사인 석전대제를 지방 수령이 석전제를 올리는 것을 전통으로, 본 향교는 강서구청장이 초헌관으로 석전제를 올린다.
구한말 갑오개혁(1894년)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됨으로 인해 교육기관의 기능은 상실하고 문묘 기능만 남아있다. 현재 서울시 문화재 기념물 제8호로 등재되어 있다.


홍살문

홍살문

홍살문이란 충신, 효자, 열녀들을 표창하여 임금이 그 집이나 마을 앞, 능, 원, 묘, 궁전, 관아 등에 세우도록 한 붉은 문이다. 홍살문의 원음은 홍전문. 붉을 홍, 화살 전, 문 문, 한마디로 붉은 화살로 된 문이란 뜻이다. 홍살문이 설치된 곳에서 2km 이내에는 하마비가 설치되어 있다.


외삼문

외삼문

외동문, 중앙의 외신문, 외서문으로 구성되며 동문으로 들어가고 서문으로 나가야 한다. 석전행사 시에는 외신문을 개방한다.
올라가는 계단이라고 적혀있는 쪽, 곧 오른쪽이 동문이고 왼쪽이 서문이다. 가운데 외신문은 혼령이 드나드는 문이라 하여 평상시에는 열어 놓지 않는다.

주요 행사

석전대제

문묘에서 공부자와 성현께 제향하는 의식을 일컫는다. 춘추길일인 매년 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에 전통 악기와 제기를 사용하여 제를 올린다. 금관제복을 입고, 익히지 않은 음식을 올리며, 고전음악인 문묘제례악과 팔일무를 치며 성대히 지낸다. 석전대제는 예술적 가치가 크며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되어있다. 국가적 대사로 성균관에서는 임금이 석전제를 올렸고 향교에서는 지방 수령이 석전제를 올렸다.

양천향교의 석전대제는 강서구청장이 초헌관 역할을 하여 새학기의 시작을 축하하고, 문묘에 모셔진 공자님을 비롯한 성현들께 석전제를 올린다.

분향례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 대성전의 성현께 향을 올리는 행사이다. 성균관을 비롯한 모든 향교에서는 매월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 행하는 분향례로 지금도 행하고 있다. 15일간 향교의 대소사를 성현께 보고하는 형식의 고유제를 겸하기도 한다.

이곳에서는 삭망 분향례를 음력 초하루와 보름 오전 10시에 행한다. 그리고 봄과 가을에 타지방 향교를 견학하고 능이나 묘를 보살피는 행사를 한다. 향교 행사에는 유림이 아닌 일반인도 참석할 수 있다고 하니 관심이 있으면 참석해보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 될 것 같다.

성년례

소년, 소녀가 성인이 되는 해 생일날에 집안의 큰 어른을 큰 손님으로 초대하여 성년례를 행해주었으며 성년이 되는 사람은 어른으로부터 자를 받고 인생의 귀감이 되는 글과 말씀을 전해 들으며 주법도 배우는 각 집안의 행사였다. 지금은 집체성년례라하여 성인이 되는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정해진 날에 실시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월 1회 성년례 행사를 하려 계획 중이며, 아기가 태어나면 집안 어른이 지어 내리는 작명례 행사를 요청 시 할  수 있다.

혼례

20년 전부터 전통 혼례를 하고 있으며 15일 이전에 신청하면 혼례를 치를 수 있게 도와준다.


동재서재

동재, 서재

유생들이 공부하며 숙소로 사용하던 곳이다. 내가 갔을 때는 누군가 살고 있는 듯했다. 공부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이곳을 관리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둘 다 일지도.




명륜당

명륜당

교궁, 학당 및 교실로서 학생 30~50명이 교육을 받았으며, 교수 1인, 직원 1인이 교육을 담당하고 과거시험은 성균관에서 직접 관장하였다. 각 향교에서 1, 2명씩 30여 명을 모아 한 곳에서 과거시험을 치르도록 하였으며 봉급 없는 벼슬 진사, 생원의 직급을 준다.

내삼문

내삼문

문묘에 의례 시에 출입하는 문이다. 외삼문과 마찬가지로 들어갈 때는 동쪽(오른쪽) 문을 통해야 하며 나올 때는 서쪽(왼쪽) 문으로 나와야 한다. 중앙의 문은 신문이라 하여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출입을 금한다.

대성전

내가 방문했을 때는 내삼문이 굳게 닫혀있어 아쉽게도 대성전을 사진으로 담지 못했다. 문묘의 정전으로서 공부장의 위패를 모시는 전각이다. 어찌 보면 가장 중요한 장소이기도 한데, 그렇기 때문에 들어가지 못해 못내 아쉽다. 향교 내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 공부자의 위패를 중앙 정위로 하여 4성과 송조사현,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동서로 위차봉안되어 있으며, 공자를 비롯한 유가 성현들의 위패를 모셔놓고 1년에 2회 정기적으로 석전을 지낸다. 이 건물과 공간을 통칭해 문묘라고 한다.


감상

어렸을 때 교과서에서만 접했던 향교를 직접 가보니 신기하기도 하고 감회가 새롭기도 했다. 지방의 고등교육기관이며, 현재로 치면 지방대 정도로 보면 될 것이다. 향교가 전국의 부목군현마다 있었다 하니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백성들의 교화에 많은 공을 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의 낮은 문맹률, 그리고 높은 교육열은 괜히 다른 데서 온 것이 아닐 것이다. 예로부터 문을 숭상하는 기조가 민족의 DNA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런 훌륭한 제도와 미풍양속들이 현대사의 소용돌이를 거치며 거의 명맥이 끊기다시피 한 부분이 아쉽다. 현재의 대학교들 대부분이 서구의 형식과 제도를 그대로 차용하여 운영되고 있는데 우리 본래의 것도 분명 존재했음을 알고 계승 발전시켜 현재의 교육기관에 접목해 보는 것은 어떨까 상상해본다.


운영정보

운영시간 - 매일 10:00 ~ 16:00 월요일 휴무

입장료 무료

홈페이지 http://www.hyanggy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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