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초에 우리 동네에 있는 의릉에 갔다 왔습니다. 나들이 삼아 갔다 왔는데 기대 않았던 가을 풍경이 너무 좋았습니다. 가까운 곳에 산책하기 참 좋은 장소가 있었다는 것을 3년 동안 까맣게 모르고 살았습니다.
의릉에 대해
조선 제20대 경종과 두 번째 왕비 선의왕후의 능입니다. 경종(1688~1724)은 제19대 숙종과 옥산부대빈 장씨(장희빈)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690년 숙종 16년에 왕세자가 되었으며 1717년에 숙종을 대신하여 정사를 보다가 1720년 왕위에 올랐습니다. 경종의 재위 기간은 노론과 소론의 정권 다툼이 극심한 시기였습니다.
자식이 없어 이복동생인 연잉군(영조)을 왕세제로 책봉시켰으나 이 일로 노론과 소론이 치열하게 대립하여 옥사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병약했던 경종은 재위 4년 3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의릉은 동원상하릉의 독특한 형태로 같은 능역에 위쪽은 왕릉을, 아래쪽은 왕비릉을 조성하였습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능역의 폭이 좁아 좋은 기운이 흐르는 맥이 벗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풍수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경종에 대해서
역사는 경종을 병들고 허약했던 왕으로 기록합니다만 왜 병약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실록과 야사를 근거로 그의 면면을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
학문에 힘쓰는 것을 중히 여겼던 숙종은 세자에게 늘 학문을 갈고 닦아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이에 세자는 4살 때 천자문을 익혔고, 8살에 성균관 입학례를 치렀습니다. 실록에서는 '세자가 입학례를 행하는데 글을 읽는 음성이 크고 맑아서 대신들이 서로 축하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전합니다. 이렇듯 경종은 조선의 여느 왕자들처럼 어린 시절 영특함을 칭찬받는 평범한 세자였었죠. 그러나 그가 14살이 되던 해, 경종의 일대기에 반전이라고 할 만한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지죠.
1701년 10월, 대신들의 상소가 이어졌습니다.
"전하, 지금 희빈(경종의 생모)이 설령 용서하기 어려운 죄가 있다고 하나, 춘궁(경종)이 걱정하고 마음 상할 것을 염려하여 조금 너그럽게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하지만 이미 마음을 굳힌 숙종은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비록 세자의 생모라고 하나, 자신의 거처에 신당을 짓고 인현왕후를 해하려는 음모를 꾸민 장희빈의 간악함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겁니다. 그리고 얼마 후 숙종은 희빈 장씨에게 사약을 내립니다.
일설에서는 이날의 정황을 이렇게 그리기도 합니다.
"사약을 받은 희빈 장씨는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고 싶다고 숙종에게 애원을 거듭했다. 숙종은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한 때 부부의 연을 맺었던 여인의 마지막 소원을 끝내 거절하지는 못했다. 결국 세자를 희빈 장씨에게 데려다주었고, 이때 예기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독기 서린 눈빛으로 변한 희빈 장씨가 세자에게 달려들어 세자의 하초를 움켜쥐고 잡아당겨 버린 것이다. 곁에 있던 환관들이 겨우 세자에게서 장씨를 떼어 놓았지만 세자는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이 일화는 장희빈의 간악함을 극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후세의 호사가들이 지어낸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경종에게는 어머니 장희빈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경종은 평생 원인 모를 병환에 시달렸고 자식도 낳지 못한 채 승하하고 말았죠.
경종은 숙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왕위에 오르지만 정사를 돌보기 힘들었습니다. 경종은 자신이 항상 병환에 시달렸으므로 재위 기간 4년 동안 업적을 남길 기력도, 시간도 충분하지 않았죠.
그러나 비록 몸이 성치 못했을지라도 경종의 따뜻한 성정은 실록의 기록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합니다.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는 아니었지만 인현왕후를 마음으로 섬겼고, 살아서 자신에게 몹시 엄한 아버지였지만 숙종이 병석에 들자 십 수 년 동안 약시중을 들었다고 합니다. 이에 실록은 경종 사후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받아들이는 아량이 넓으시어 무릇 대신들에게 가슴을 열고 마음을 비워 받아들이지 않음이 없었는지라, 식자들은 훌륭한 보좌가 없어 이상적인 정치를 도와 이루지 못하였음을 매우 한스럽게 여겼다"
매표소 입니다. 입장료는 1000원이며 성북구민이면 50% 할인해줍니다.
홍살문과 그 뒤로 정자각이 보입니다.
언제나 능과 사당 또는 제례 관련 문화재를 방문할 때는 중앙길을 피해서 다녀야 합니다.
가운데 길은 신령들이 다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정자각이며 왕릉제향을 올리는 정丁자 모양으로 지은 건물입니다.
홍살문은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문으로 붉은 칠을 한 둥근 기둥 2개를 세우고 위에는 살을 박습니다.
관광가이드가 열심히 문화재에 대한 설명을 하는 모습입니다. 조선의 왕릉 42기가 인류의 문화유산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사실을 알고 계셨는지요.
비각으로 비석이나 신도비를 보호하는 건물입니다.
의릉의 비문입니다. 능 주인인 경종의 행적을 기록한 신도비이죠. 1724년 경종이 세상을 떠난 후 세웠던 표석에 1730년 선의왕후가 세상을 떠난 후 최종적으로 새긴 표석입니다.
의릉 옆으로 난 산책길입니다. 가을 단풍이 예쁩니다.
의릉 뒤편 산책로에 있던 향나무인데 왜 이런 모양일까요. 아마 번개를 맞아서 이렇게 두갈래로 갈라지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관람시간
기간 |
매표시간 |
관람시간 |
2월~5월, 9월~10월 |
09:00~17:00 |
09:~18:00 |
6월~8월 |
09:00~17:30 |
09:00~18:30 |
11월~1월 |
09:00~16:30 |
09:00~17:30 |
관람요금 :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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