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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경기

인천 차이나타운에 가다

by U.ken 2018.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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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타운에 가다

지난 11월 말경이었을까, 항상 실외에서 활동하는 나로서는 어느새 매일 아침 미세먼지 예보를 체크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만큼 미세먼지가 극심하고 미세먼지 포비아는 어느새 익숙한 신조어가 됐다.
이날 아침은 미세먼지 정도가 최적의 단계를 예보하고 있어 심히 좋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미세먼지 농도에 일희일비하는 웃픈 현실 속에 사는 2000년대의 우리네 모습이다.
인천 송도에 마침 업무가 생겨 아침 일찍 업체 미팅을 하고 점심은 차이나타운에서 해결하는 것으로 정했다. 4년 전 이곳에서 애인과 데이트를 했던 기억을 떠올리는 추억의 장소로 뇌리에 박혀있다. 외근을 주로 하는 직종에 종사하면 점심 식사 선택지가 거의 무한에 가깝다는 이점이 있다. 이것은 꽤 큰 이점이다. 사무직 종사자는 맨날 가던 음식점 몇 군데를 돌려가면서 가야 한다.

청일조계지

청 · 일 조계지 쉼터

사진에 보이는 곳은 조계지 쉼터다. 차이나타운이 있는 이 직역은 개항기 외국인이 집단 거주하였던 조계지로 본 계단을 기준으로 좌측은 청나라의 조계, 우측은 일본의 조계로서 1883년부터 30년간 지속되었다. 1910년 국권침탈 이후 폐지되었으며 중앙부의 계단은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51호로 지정됐다. 조계는 개항 도시에 있었던 외국인 거주지역이다. 이곳에서는 외국이 행정권과 경찰권을 행사하였고, 곧 치외법권 지역이었다.
인천 중구에서는 이곳에 쉼터를 조성하여 조계지 돌계단을 보존하였다. 쉼터 좌측(청나라)과 우측(일본)에 당사국의 고유 양식의 석등을 배치하여 역사적인 상징성을 높였다.
계단의 상단부의 공자상은 양 지역 간 교류협력을 위해 중국 청도시 시남구의 기증으로 받은 것을 설치한 것이다.


4년 전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

차이나타운이 청나라와 일본의 조계지였다는 사실을 왜 4년 전에 왔을 때는 몰랐을까. 모든 뇌세포와 신경세포가 애인을 향하고 있어서였을까. 이것이야말로 낫 놓고 기역 자 몰랐던 꼴 아닌가. 특히 이곳이 관광지로서 각광 받던 것이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라고 한다. 방송을 타면서 뜬 지역이라고 이곳에 사는 주민이 얘기하셨다.
4년 전에 왔을 때는 일본의 영역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그래서 이번에는 일본 쪽을 먼저 둘러봤다. 가옥들이 확실히 일본풍의 모습이었다. 낮은 천장, 좁은 가로 폭, 나무 재질, 잘 정비된 네모반듯한 모양의 창과 기와지붕이 특색이다.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일본은 예로부터 지진의 피해가 잦았기 때문에 건물을 튼튼하게 지어야 하고, 그러려면 기둥의 폭을 줄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일본가옥


일본가옥


표지판

이곳의 표지판이 이곳이 품고 있는 모든 장소를 알려준다.


차이나타운

차이나타운

위 차이나타운으로 입성하는 현관문이랄까. 이곳을 통과해서 차이나타운 안으로 들어갔다. 일본 쪽은 크게 볼 것은 없는 것 같다. 쓱 지나쳐서 차이나타운으로 향했다.
차이나타운으로 들어서자마자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일본 쪽은 정갈하면서 고요하고 자제하는 느낌이라면, 이곳 청나라 쪽은 온통 화려하다. 중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색깔인 빨간색 천지고, 돈을 좋아하는 특성이 있어서인지 황금빛이 많이 보인다. 주로 이런 패턴이다. 빨간색 배경에 황금색 글자로 이루어진 간판.
일본 쪽과 또 다른 점은 처마 끝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중국쪽은 처마 끝이 하늘로 치솟아 있어 뻗어 나가려는 기개와 활기참이 엿보인다면, 일본의 그것은 차분하게 아래를 향하고 있어 자연에 순응하고 매사 겸손함이 엿보였다.

차이나타운


차이나타운

짜장면

온통 짜장면집이었다. 이곳에 와서 짜장면 한 그릇 안 먹고 가면 무슨 큰일이라도 벌어질 것처럼.
짜장면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1884년 인천에 청국 조계지가 설치되면서 중국 상인과 노동자가 많이 유입했는데, 이들을 위해 값싸고 간편한 음식으로 만들어진 것이 짜장면이었다. 처음에는 산둥 지방의 토속 면장에 고기를 볶아 손수레에 재료들을 싣고 부둣가로 나가 직접 수타면으로 만들어 팔았다. 일제강점기 청관을 중심으로 번성했던 짜장면은 1950년대에 화교들이 캐러멜을 첨가한 한국식 춘장을 개발하면서 우리 입맛에 맞는 오늘날의 짜장면으로 탄생했다.

차이나타운

초한지 거리

나는 어려서부터 중국 고전을 아주 좋아했다. 지금 다시 보면 순 뻥과 과장 투성이지만 그 안에 많은 교훈과 지혜가 녹아 있다.
약 50m 정도 되는 거리의 벽에 초한지의 서사와 등장하는 영웅들의 그림과 설명이 가득했다. 시간이 많다면 하나하나 찬찬히 음미하고 곱씹으면서 하나도 빠짐없이 읽고 보고 지나가겠지만 내게는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 아쉽지만 말이다. 대출 훑어가며 지나갔다.

초한지거리


초한지


선린문

선린문

초한지 거리가 끝나는 시점에 나타나는 선린문이다. 이곳을 통과해 산을 오르면 한미수교백주년기념탑이 있다. 산의 이름은 응봉산이다. 왜 차이나타운 선린문을 통과해서 다다른 곳에 뜬금없이 한미수교백주년기념탑이 있는지 모르겠다. 산에 오르기도 힘들고 시간도 없고 뜬금없는 구조물이라서 올라가 보지는 않았다.

인천의 화교 사회는 1883년 개항과 함께 형성되기 시작하여 1884년 청국 조계지 설정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정착하기 시작했다. 한국 화교는 해외 이주민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고 화교의 문화는 어느새 우리의 일상사에 깊이 들어왔지만, 한편으로 화교는 각종 제도적 제한과 차별 대우 등 경계의 대상이며 억압과 배제의 희생양이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중국과의 우호적 외교 관계로 화교와의 관계가 좀 더 긴밀하고 친화력이 높아졌다. 이는 중국 위해시가 기증한 ‘중화가’, ‘인화문’, ‘선린문’등 3개의 패루(패방)이 의미하는 뜻에서도 알 수 있다. 공덕을 치하하거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 설치하는 ‘패루’는 차이나타운의 대표적 상징물로 탑 모양의 중국 전통대문으로 정교하면서도 아름다운 건축양식과 문화예술이 하나로 융합된 모습을 잘 보여준다. 특히 ‘3패루’라 불리는 ‘선린문’의 ‘선린’은 ‘선한 이웃’이라는 뜻으로 이곳 ‘화교’와의 우호적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차이나타운


화덕만두

화덕 만두가 어떤 맛일지 궁금했다. 그러나 점심으로 먹은 짜장면이 이미 내 위장을 선점한 터였다.


포청천

초등학생 때 중국 드라마 '포청천'을 재밌게 본 기억이 났다.


삼국지벽화거리

삼국지 벽화 거리

차이나타운의 동쪽 끝에는 '삼국지 벽화 거리'가 있다. '초한지 벽화 거리'와 마찬가지로 삼국지의 시기별 대서사와 영웅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보던 이야기라 상당히 감격에 젖어서 한참을 서 있었다. '이런 거리가 있다니...' 사실 삼국지에 흠뻑 빠지면서 중국 고전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초한지'도 보게 되었던 것이다. 30m 남짓한 거리를 30분에 걸쳐 지났다. 시간적 여유가 없었지만 삼국지 벽화 앞에서는 로열 리스펙트를 보여줘야만 했다.

삼국지


일본가옥

레트로? 오락실과 사진관

2018년의 화제의 키워드는 역시 레트로다. 현실이 워낙 빡빡해지다 보니 오랜 기억 속에서 좋았던 부분만 꺼내오는 선택적으로 미화된 메모리. 옛것을 그대로 가져오기보다는 재구성하여 선보이는 현상이 많이 나타났는데 이곳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락실과 흑백사진관이 보였다. 아쉬운 것은 오락실이다. 이곳 일본 가옥과 오락실은 너무 안 어울린다. 바로 옆 흑백사진관은 주변 풍경과 너무너무 조화를 잘 이루지만 오락실은 영 아니다. 하지만 나는 오락실에 들어가서 열심히 오락을 즐겼다는 것은 반전.
오락실은 내가 초등학생 때 하던 오락기 그대로 구해와서 운영하지만, 내부 분위기는 어렸을 적 어두침침한 오락실과는 달리 산뜻하다. 이것이 레트로의 핵심. 망설이지 않고 오락실로 들어가서 철권을 했다. 첫판에 30초 만에 깨지고, 화가 나서 한 판 더 했다. 여지없이 깨졌다. 육두문자를 내뱉으며 오락실을 박차고 나왔다. '여기 사장님 난이도 조절에 실패했어, 다신 안 와'

레트로 오락실

오락실 사진만 찍었다. 사실상 옆 가게 흑백사진관을 사진으로 남겼어야 했다. 훨씬 더 느낌 있는 가게였기에 말이다.


오락실

21세기 3D 비디오 게임이 난무하는 시대에 이런 허접한 그래픽의 게임이 버젓이 운영되고 있다. 어렸을 때 많이 했던 보글보글 게임과 비행기 게임이다. 추억의 게임이라 500원이 아까운 줄 모르고 하게 되기는 하지만 이 유행이 그리 오래는 못 갈 것 같다. 주로 나이가 30대 이상이 이런 고전 게임에 대한 추억이 있어서 앉아서 오락을 하겠지만 죽치고 앉아서 오락을 할 아재가 몇이나 되겠는가. 그리고 젊은 친구들은 한두 번 호기심에 하기는 하겠지만 훨씬 재밌고 스펙타클한 게임이 얼마든지 있는데 이런 고전 게임에 대한 흥미가 지속될 리는 없지 않겠나.


레트로

내가 지금 1980년대로 돌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일으키는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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