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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경기

수원 화성 야경이 예쁜곳 팔달산 서장대

by U.ken 2020.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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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과 수원화성 부대찌개 맛집인 두꺼비집에서 부대찌개를 먹고 배를 꺼뜨릴 겸 팔달산에 올랐다. 화성 서편에 위치하는 팔달산은 야트막한 야산으로 말이 산이지 오르막길이 있는 공원에 가깝다. 성인 남자의 걸음으로 정상까지 10분 정도면 오른다. 산은 낮지만 수원 화성 일대가 그보다 더 낮은 분지지형이기에 정상에 오르니 탁 트인 야경이 멋있었다.

화성 전경이 시원하게 보인다. 특이한 점은 화성 내부의 건물은 높아야 3층 정도여서 저 멀리 아파트 단지가 있는 곳의 풍경과는 대조적이다. 더 친근하고 사람 사는 동네 같은 느낌이다.

 

서장대(西將臺/seojangdae)

 

장대란 성곽 일대를 한눈에 바라보며 화성에 주둔했던 장용외영 군사들을 지휘하던 지휘소다. 화성에는 서장대와 동장대 두 곳이 있다. 서장대는 화성의 서쪽에 위치한 팔달산 정상에 있으며 ‘화성장대(華城將臺)’란 편액은 조선의 22대 왕 정조가 친히 쓴 것이다. 
1794년(정조 18) 8월 11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 29일 완성되었다. 8월 11일 터 닦기 공사에 착수하였고, 9월 16일에 상량하고, 9월 29일에 완공하였다. 서장대에서는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연을 치른 을묘년 행차 때 장대한 군사 사열식인 성조식(城操式)을 치렀으며, 이를 기념해서 친필로 ‘화성장대(華城將臺)’라는 현판을 썼다. 『화성성역의궤』에는 “문지방 위에 임금께서 쓰신 큰 글자 ‘화성장대’로 편액을 붙였다.”라고 하였다. 이 현판은 20세기 초에 사라져 버렸고, 지금의 현판은 1971년에 건물을 새로 고쳐 세우면서 새로 달아놓은 것이다. 상량문은 당시 우의정으로 있던 채제공(蔡濟恭)이 썼다.

정조는 1795년(정조 19) 윤2월 12일 현륭원(융릉) 참배를 마치고 서장대에 올라 성을 수비하고 공격하는 주간 훈련과 야간훈련을 직접 지휘했다. 서장대에서의 군사지휘는 왕이 직접 행하였는데, 그 절차와 훈련 내용은 따로 규칙으로 정해져서 함부로 바꿀 수 없도록 하였다. 『화성성역의궤』「의주(儀註)」편에 “임금께서 친히 참가하는 서장대의 군사 훈련 의식”이라는 항목이 마련되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정해진 규칙에 따라 군사들이 각종 무기와 신호용 깃발이나 포를 갖추고 성곽 곳곳에 늘어서 있고, 서장대 주변에는 지휘관들이 둘러선 가운데 왕이 서장대에서 직접 군사 훈련을 이끌도록 되어 있다. 정조의 명령이 하나씩 떨어질 때마다 우렁찬 나팔소리와 함께 서장대에서 깃발이 올라갔으며, 이를 본 사방의 성문에서는 화포로써 응대하고 깃발을 흔들었다. 이것은 실제 전투가 벌어졌을 때를 상정해서 짠 치밀한 군사 훈련 의식이었다.

 

 

서노대(西弩臺)

팔달산 정상에 자리하고 있는 서노대(西弩臺)는 돌축대 사이를 벽돌을 채워 쌓아 높이 만든 시설물로 이곳에서는 군사 명령에 따라 오방색 깃발을 흔들어 명령을 전하기도 하고, 또 쇠뇌라는 큰 화살을 날리기도 하였다.
노대는 '무비지(武備誌)'에 이르기를, 위는 좁고 아래는 넓어야 하며, 대 위에 집을 짓되 모양이 전붕(戰棚)과 같이 하고, 안에 노수(弩手)가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서노대는 그 제도를 따른것이지만 '무비지'에 있는 그대로 지은 것은 아니다.
'무비지'에는 육각으로 되어 있고, 오르는 계단 두 개이며 노수가 들어가는 집이 있었다. 그러나 서노대는 팔각으로 깍아지른 듯이 우뚝 서 있으며 오르는 계단도 한 개로 하였고, 집도 얹지 않았다. 돌계단에 기와 벽돌을 쌓아 면을 만들고, 돌을 깎아 모서리를 만들었다.
돌계단은 정 동향의 한 면을 틔어 설치하였다. 대 위에는 네모난 벽돌을 깔고, 한 가운데에 또다시 방대(方臺)를 쌓았다. 건축재료로 돌과 벽돌을 동시에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여장(女墻)도 벽돌로 만들었는데 철형여장을 7면에 설치하였고, 각각 총안을 뚫었다.
서노대에 오르면 성밖의 서쪽이 한눈에 들어오며 적으로부터 군사 지휘소를 효과적으로 보호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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