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나 연인이 있다면 함께 걷고 싶은 수원화성에 왔다. 성 내부는 상당히 넓고 공원 조성이 잘 되어 있어 걷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긴다. 마을은 층고 제한이 있어 집들이 아담하고 옹기종기 모여있어 정감이 간다.
수원 화성
조선시대 정조가 지은 수원의 성곽 건축물로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도 등록되었으며, 치밀한 사전 계획 하에 만들어진 계획도시며, 수원시의 상징이자 랜드마크다. 오늘날의 수원화성은 수 차례의 자연재해와 한국전쟁 당시 파괴된 것을 일부 복원한 상태이다.
원래 유네스코에 등재되는 건축물은 원본 그대로인 건축물이어야 하는데 수원화성은 이러한 규칙에 맞지 않지만, 조선시대에 수원화성을 계획하면서 그림과 글로 설계도와 내용을 철저하게 남겨놓은 화성성역의궤 덕분에 원형에 가깝게 복원할 수 있었다는 점을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다.
화성(華城)은 경기도 수원에 있는 조선 시대의 성곽이다. 조선시대 정조대왕이 자신의 부친인 장헌세자의 묘를 옮기면서 읍치소를 이전하고 주민을 이주시킬 수 있는 신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방어 목적으로 조성하였다. 1794년 2월에 착공하여 2년 반에 걸친 공사 후 완공되었다. 성곽 전체 길이는 5.74Km이며, 높이 4~6m의 성벽이 130㏊의 면적을 에워싸고 있다.
처음부터 계획되어 신축된 성곽이라는 점, 거주지로서의 읍성과 방어용 산성을 합하여 하나의 성곽도시로 만들었다는 점, 전통적인 축성 기법에 동양과 서양의 새로운 과학적 지식과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는 점, 그 이전의 우리나라 성곽에 흔치 않았던 다양한 방어용 시설이 많이 첨가되었다는 점, 주변 지형에 따라 자연스러운 형태로 조성해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여 준다는 점 등의 특징이 있다. 1801년에 간행된 화성 준공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를 통해 공사의 자세한 전말을 알 수 있다.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사적 제3호)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 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 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 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조 18년(1794년)에 축성공사를 시작, 2년 뒤인 1796년에 완공했으며 정약용이 성을 설계하였다.
수원화성은 거중기, 활차, 녹로 등 신기재의 발명과 활용,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한 축성방법 등 18세기 과학과 건축, 예술을 살필 수 있는 대한민국 성곽 건축사상 가장 독보적인 건축물로 평가받는다.
수원화성은 방어 기능과 성벽안에 갖추어진 4개의 성문을 비롯해 각기 다른 모양과 특성을 지닌 건축물의 가치를 인정받아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대한민국 으뜸 관광 명소’, ‘CNN 선정 한국에서 가봐야 할 아름다운 곳 50곳’, 2012 한국관광을 빛낸 ‘한국관광의 별’로 선정된 바 있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
사도세자는 조선왕조 제21대 왕인 영조의 둘째아들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아버지 영조의 명령으로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정조는 영조의 왕위를 계승한 후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의 화산으로 옮기고 화산 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의 팔달산 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화성을 축성했다.
수원 화성은 정조의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그 축성의 근본이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 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 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 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다. 또한 수도 남쪽의 국방 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원 화성은 규장각의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해 만든 『성화주략(城華籌略)』(1793)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 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되었다. 축성 당시 거중기 녹로(도르래 기구) 등 건축을 위한 새로운 기계를 고안해 큰 규모의 석재를 옮기고 쌓는 데 이용하였다.
수원 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 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 있다. 수원 화성은 축조 이후 일제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되어 없어졌으나 1975년~1979년까지 축성 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해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저 멀리 왼편에 동장대가 보인다. 동장대는 1795년(정조 19) 7월 15일 공사를 시작하여 8월 25일 완공했다.
무예를 수련하는 공간이었기에 연무대라고도 하였다.
이곳의 지형은 높지 않지만 사방이 트여 있고 등성이가 솟아 있어서 화성의 동쪽에서 성 안을 살펴보기에 가장 좋은 곳이다.
성곽 안 마을은 건물 높이 제한이 있어 고즈넉한 모습이다. 그런 모습이 성 밖의 고층건물의 모습과 대비된다.
화성의 제원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로 동쪽 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를 갖고 있다.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咆)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 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에서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4개 시설물이 아직 남아있다.
수원 화성은 축성할 때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 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남아 있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적, 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이었기 때문에 성곽 자체가 ‘효’ 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 외에도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지닌 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 화성에는 이러한 효 사상과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다.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 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 계산, 시공 기계, 재료 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화성이 성곽 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으며 동시에 기록으로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
수원 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보물 제403호), 장안문, 공심돈 등이 있다.
화성 성벽 축조에 사용한 바위의 크기를 사진기의 렌즈 커버와 비교해보았다. 정약용의 거중기가 없었더라면 이렇게 큰 바위를 들어 올리지 못해 성을 짓지 못하거나 공사기일이 몇 배는 더 걸렸을 것이다.
화성 주변의 경관은 굉장히 아름답다.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수원시와 정부가 많은 공을 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동쪽 성문에서부터 북쪽의 장안문까지 왔다가 마을로 향했다. 대략 1시간 정도 소요된 듯 하다. 이곳의 분위기는 한적했고 파란 하늘과 어울리게 공기도 맑았다. 주변 건물이 낮아 시야가 사방으로 트여있고 공원 조성을 잘해놔서 가끔 산책을 하러 나오기 좋은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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